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

Why We Can't Wait (Prebound) Why We Can't Wait (Prebound)
King, Martin Luther, Jr. | Bt Bound | 200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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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를 읽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헤어지며, 자신의 삶과 연관된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외모로 판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생김새에 따라서 그 사람을 미리 판단하고 대하게 된다. 때론 자신과 다른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고 회피하려고도 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가 될 수 없는 마음의 벽이 존재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지난해 11월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사상 첫 미국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 유색인종 대통령 당선자이다. 흑인이든 유색인종이든 미국에서 그들은 백인이 아님은 확실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대통령에 압도적으로 당선이 되었고, 흑백의 구별이 심각했던 미국사회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오바마의 당선을 지켜보면서 1963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 모인 25만 명의 청중에게 흑인과 백인이 하나되는 세상에 관한 자신의 소박한 꿈을 역설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우연히 마틴 루터킹에 관한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흑인으로 평가되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주었으며, 흑인으로 억압받던 이들의 평등한 자유에 향한 꿈을 현실로 이루어지기 위해 많은 헌신을 하였던 그의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정의, 열정 등으로 가득한 그였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백인이 흑인들에 가졌던 증오와 미움까지 뛰어 넘을 수 있는 비폭력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염원한 세계적 민권운동가로 평가 받고 있다.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라는 마틴 루터 킹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다시 그를 떠올리게 되었고,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마틴 루터 킹은 1920년대 미국의 중산층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한 지 벌써 반 세기가 지났지만 오랜 세월 백인의 의식 속에 뿌리 박힌 흑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흑인들은 `흑인 전용 구역'에서 `검둥이'라는 호칭을 감수하며 열등의식을 배워야 했다.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빈민층 흑인들에 비하면, 청년 시절 폭력과 마약에 찌들며 소년원을 들락거려야 했던 말콤 엑스와 달리 중산층 흑인 가정에서 태어난 킹이 스물 일곱 살까지 학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지만, 상점 규모에 상관없이 언제나 한 군데의 카운터를 이용하고, 백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불합리한 현실에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희망대로 학자가 되느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느냐로 고민하던 마틴 루터 킹은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남부의, 몽고메리 지역 목사를 선택했다. 고향으로 되돌아 가야겠다는 의지 한편으로, 교육 받은 흑인들이 그렇지 못한 흑인들에게 교육적 경험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서 흑인 민권 운동의 모태가 된 버스 흑백 차별 거부 운동이 일어난다. 한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아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 지역적인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확대되면서 결국 버스 내 흑백 분리법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받아낸 것이다. 킹 목사는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철저한 단합과 의지로 보여 주자는 비폭력적 방법을 주도하면서 민권 운동의 대열에 앞장서게 된다.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을 무저항이 아니라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폭력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부르고, 증오와 원한은 그 객체나 주체 모두를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며, 비폭력이야말로 있는 힘을 다해 사악한 제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합리적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는 비폭력을 단순히 폭력에 반하는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 흑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태도라고 보았으며, 다양한 가치와 철학 속에서 발견한 가장 합리적인 사고라고 주장했다. 또한 마틴 루터 킹은 노련한 연설가이자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심오한 철학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복잡한 것을 간단한 것으로 바꾸어 설명할 줄 알았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거부감 없이 사람들을 이끌 줄 알았고,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하려는 도덕적 의지가 있었다. 더불어 사람들의 지지와 명성 속에서 스스로 교만해지기 쉬운 마음을 다스리는 끊임없는 훈련까지,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몸소 실천하려고 했다. 196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1968년 괴한의 촘에 암살을 당할 때까지 10여년간 전국을 돌며 비폭력과 정의에 대한 연설을 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는 1963년 노예 해방 100주년을 맞아 열린 워싱턴 평화 행진에서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던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중에 한 대목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그는 39세의 나이로 암살되었고, 뒤늦은 1999년 배심원단은 그의 죽음이 마피아와 정부 비밀 조직과의 음모라고 평결했지만 그를 저격했던 살해범이 감옥에서 사망하면서 암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밝혀지지 않은 채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빛나 보였던 순간은 워싱턴의 25만 인파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그 유명한 연설을 할 때도 아니고, 노벨평화상 수상을 한 때도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을 때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물론 그와 함께 싸워온 사람들까지도 왜 그런짓을 하느냐고 비난하고 등을 돌렸을 때 그 고독하고 외로운 순간에 그가 보여준 태도였다.
특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비겁한 사람은 안전한가를 따지고 편의주의자는 편리한 방법인가를 따지며,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호응이 좋을까를 따진다. 하지만 양심적인 사람은 옳은가를 따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함께해 주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본질을 왜곡하고 욕을 한다 해도 외로이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가 있다는 그의 말이 그 동안 나는 이러한 용기를 갖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왔을 때 나 또한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은 여러가지 어려움과 역경을 겪으며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그 메시지 중 ‘밤이 깊고 어두울 때에야 비로서 별을 볼 수 있다.’ 라는 말이 내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조금 힘들고 어려울 기미만 보여도 포기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은 희망이라는 본래 의미를 알 수 없고 어두움 속을 밝혀주는 아름다운 별빛을 발견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희망이라는 별빛은 꿈을 가진 자들만이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람들은 꿈을 꾸며 살아간다. 오늘의 꿈이 내일의 현실로 다가오고 또 다른 꿈을 향해서 전진한다. 헛된 꿈을 향해 쫓아가기보다는 소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말하며, 내가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를 위해 손 내밀어 도울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를 북돋을 수 있다면 나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닌 미래의 희망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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